우주 대스타 소설가, 정세랑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었다

2023. 6. 30. 00:01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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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의 ‘10년 만의 첫 SF 소설집’이라고 하는데 그 문구에 나 혼자 감격했다. 이쯤 되면 중증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정세랑의 소설에 대해서라면 말이다.

흥미로운 소설들이 많다.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지렁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현대 문명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리셋’이라는 소설이 일단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대단히 우울한 문명의 미래를 상상한 이야기인데 어째서인지 “멸망이, 멸종이, 끝이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 듯도 한데 엄마들과 내 삶은 이상하게 평화”롭다. 

어째서일까. ‘도시를 이루는 거의 모든 구성물을 소화해 분변토로 만’드는 거대한 지렁이는 분명 징그러운데 어째서 지구에서의 삶이 더 선해지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가. 그래, 이쯤 되면 멈출 때도 되었지, 지렁이가 다 구원해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까지 드는 건 무슨 조화인가. 곱씹을수록 쪼득쪼득한 이야기의 맛이 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인상적인 소설이다. 선생을 하던 ‘여승균’은 제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정부 관계자를 통해 듣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미 수용소에 들어간 상태다.) 원인은 무엇인가. 목소리다. 승균의 목소리가 범죄의 어떤 것을 자극한다는 것. 이 말도 황당하지만 수용소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황당함은 더하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어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도 있고, 온갖 바이러스를 옮기기 때문에 들어온 사람도 있고, 시체를 파먹기 때문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글로만 쓰면 굉장히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인데 이곳의 일상이 의외로 알콩달콩하다. 물론 그들의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소동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소설은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기에, 애틋하고 멋지다. 그래,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가슴을 쿵-하게 힘이 있다. 

 그 외의 소설들도 재밌지만, 그보다는 ‘선하다’는 말로 기억하고 싶다. 혹은 ‘맑음’ 같은 것이라고 할까. 물론 소설을 읽은 소감으로 이런 것을 말한다면 우와, 무지 재미없겠다!, 라고 외칠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 정세랑의 소설은 다르다. 재미가 스며있고 따뜻함도 담겨 있고 기분 좋은 여운이 가득하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은 8개. 하루에 하나씩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일주일이 맑아질 것이다. 물론 재밌기도 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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