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는 ‘천영초’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천영초는 서명숙에게 담배를 알려줬던 나쁜(?) 언니였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순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사람이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정권과 긴급조치는 물론이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 등에도 그랬다. 그 시절, 천영초는 서명숙과 함께 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고 길거리 투쟁의 맨 앞자리에 나아갔다.
야만의 시대였다. 그 시대의 폭력성은 사람들을, 그리고 여자들을 모욕했고 망가뜨렸다. 천영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당했던 고문은 이곳에 차마 옮기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럼에도 천영초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던 건 왜 일까. 그녀가 무슨 대단한 위인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다. 아니기에 더 위대했다. 그래서 더 가슴을 울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다가 정말 아팠던 순간은, 위선자들이 민주주의를 당당하게 외치고 있을 때, 젊은 시절을 그렇게 뜨겁게 보냈던 천영초가 모든 것을 잃고 하루하루 겨우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던 그 순간이다.
무슨 보상을 바라고 그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사고를 당해 뇌를 다쳐 아이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디 천영초뿐이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내고 있을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에세이다.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고맙고도 두렵다. 나는 언제 경찰들이 뛰어들지 몰라 두려워하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던 그녀들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게다가, 그 시대에 여자들이라고 하면 시위하던 남자들 간호하거나 물 떠다주거나 하는 일만 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 책에서 그녀들은 존재만으로도 눈부셨다. 경찰서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대담함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순간들이다.
<영초언니>는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안에 담긴 것들은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고 누군가의 진정한 꿈이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던 젊은이들의 열망에 대한 증언이다. 가슴이 먹먹하거나 저릿해지는 순간이 많은 것도 그것이 오롯이 전해지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그것이 내 손끝에 닿을 때, 감격했다. 참 슬프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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