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박완서의 <호미>

2023. 8. 13. 17:41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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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아주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좋아한다. 그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을 뽑으라면 <호미>다. <호미>를 읽다보면 뭐랄까.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여유로움 같은 것이랄까.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 여유로움이, 거장이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졌던 ‘인간 박완서’의 고백과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파고든다. 활자들 사이에, 그리고 자간과 자간 사이에 편안한 방에 들어갔을 때의 아늑함, 그 방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다고 할까. 무릎을 치게 만들고 살포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런 글, 그것을 <호미>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님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김매듯이 살아왔다”고 털어놓는다.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꾸준하게 김매듯이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녀에게 살아온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던가.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농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땡볕 아래서도 제 할일을 다했던 농부처럼, 모든 공을 자연에 돌리는 겸손한 농부의 모습을 닮았다.

말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작가님은 <호미>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대신에 자연을 예찬한다. “흙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더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며 흙길을 예찬하기도 한다. 그 흙을 주무르는 ‘호미’마저 예찬하고 있다.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흙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모든 찬사는 자연을 향하고 있다. 하기야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고 말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소설가 박완서가 아니라 ‘농부 박완서’라는 말을 해도 이상치 않을 것 같다.

작가님은 농부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이기도 했다. 또한 할머니이기도 했다. 그것으로서의 모습은 어떤가. <호미>에서 작가님은 자식들 이야기는 물론이고 손녀딸 이야기까지 한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의 진실함이 짙게 묻어나는 것이 손녀딸에게 문자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어느 할머니가 그렇듯, 작가님은 손녀딸을 아꼈다. 그래서 학교라는 집 밖으로 나갈 때, 문자를 해독하게 해줌으로써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끼는 마음에, 그들이 보기 쉽도록 손수 동화책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극성스러운 걸까? 지나친 욕심을 냈던 걸까? 아니다. 보고 있노라면 살며시 미소가 생겨난다. 잔잔한 감동도 뒤따라온다. 혈육을 아끼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볼 수 있기에, 특히 그것이 작가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더군다나 글의 원숙미가 한껏 묻어났기에 손자, 손녀에게 문자를 알려주는 일이며 시시콜콜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것이 되어 들려오고, 소소하지만 가슴 뭉클한 감동을 만들어주고 있다. <호미>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인 셈이다.

<호미>를 읽으면 즐겁다. 겉포장으로 둘러싸인 글이 아니라, 진솔한 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분명하다. <호미>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잔잔한 감동과 애틋한 고백을 듣는 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해주고도 남는다. <호미>는 그런 작품이다. 즐겁고 따뜻한, 산문집의 향을 가득 품어내고 있다. 그 향에 취하고 나면, 아무래도 작가님의 말을 쫓아 ‘호미예찬’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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