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헌의 <책력>을 읽었다.

2023. 5. 25. 19:50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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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헌의 <책력>은 순진하다. 단지 책을 좋아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무엇이든지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되는 시기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라 경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책들이 득세하고 있다.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미덕’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상헌은 책의 본래 목적인, ‘나’를 위한 책을 말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같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논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체가 다르다. 안상헌의 글에서는 ‘책’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도 없고,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없다.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나’를 위한 ‘책력’만을 말하고 있다. 나를 위한, 내 마음을 위한, 내 삶을 위한 책 읽기를 말하고 있다.


정말 순진하다. 요즘 이런 말 하는 책, 누가 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그의 표현처럼 소개팅에 철학책 들고 나온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당연히 그 대가는, 그 말처럼 꽝이다. 경제책이나 자기계발서 들고 나와야 그마나 성공할 터인데, 무슨 몽상가도 아니고 웬 철학책? <책력>의 인상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그의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고 있다. 잊고 있던 것을 새로이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일까? 그렇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시절 말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인문책이든 간에, 또한 그것을 읽고 얻는 것이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간에, 그 과정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었던 시절이 있다.


지금은 어떤가? 어린이들은 논술을 위해 책을 읽는다. 학생들도 논술을 위해 책을 읽는다.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자기계발서를 본다. 책읽기의 즐거움은커녕 책읽기로 인한 곤욕을 치루며 어찌할 수 없이 책을 보고 있다. 그렇게 보면, 뭔가가 남을까?


책은 왜 읽는가? 내가 잘 살아가기 위해 -너무나 진부한 것 같지만 너무나 절박한 그것을 풀기 위해- 책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읽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걱정시름을 잊기 위해 즐거움을 얻으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내가 모르는 것을 얻으려고 읽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서 책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많다. 안상헌의 <책력>은 그걸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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