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최고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2022. 12. 24. 11:15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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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헉- 했다.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을 모셔둔 게 몇 년 전인데, 다시 읽자고 마음먹은 게 얼마 전인데, 잊고 있었다. 올해에는 다시 읽으리라, 라는 마음으로 정리를 하다가, 조금만 읽어볼까?, 하고 선집의 첫 번째 <빅 슬립>을 열었는데, 헉! 다 읽어버렸다. 그때 시간은 어제 새벽 2시 조금 넘은 시간. 연휴라 다행이지. 어쨌든,

어디에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글쓰기 스승으로 2명의 레이먼드가 있다고 했다. 레이먼드 카버와 레이먼드 챈들러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누구인가. 그가 창조한 ‘필립 말로’는 엘러리 퀸과 함께 유럽추리소설을 상대한 불굴의 탐정이다. 하드보일드에 관한 최고의 고수로 뽑히는 이 남자와 엘러리 퀸이 있어 미국 추리소설은 유럽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게다.

 <빅 슬립>은 사립탐정 필립 말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살짝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33세의 미혼으로 지방검사 밑에서 수사관 생활을 했으나 반항기가 농후해 해고당했다. 비아냥거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쓸데없지 않다. 183센티미터에 85킬로그램으로 덩치가 크고 잘생겼다. 그를 고용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일당 25달러다.

이 남자가 사건 해결하는 과정은,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셜록 홈즈 같은 스타일은 아니다. ‘모아진 단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밝혀내거나 부러진 펜촉 하나로 사건을 재구성’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스타일은 무엇인가? 그는 정면 돌파다. 비정한 뒷골목이든 범죄자들의 소굴이든 간에 일단 방문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행동은 종종 헉! 하게 만든다. 설마 이대로 방문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정말 간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빅 슬립>은 필립 말로가 재벌인 스턴우드 장군의 사건 의뢰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장군은 어떤 협박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했다. 단순해 보이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스턴우드 장군의 망나니 같은, 도덕심 같은 건 전혀 없는 두 명의 딸들과 이곳저곳의 양아치와 조직폭력배들이 등장하면서 사건이 굉장히 복잡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립 말로는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방문하는데… 아, 재밌다! 그리고, 비정하다.

소설 속 누군가의 말처럼 필립 말로는 지옥에나 가버릴 성격의 비정한 남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그 쓸쓸함은 왜 이리 마음에 드는지. 비가 내리는 도시에서 탐정은 왜 이리 빛나는 것인지. 모든 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이 시니컬한 남자를 과연 누가,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든 말든 추리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으리라.

이제, 필립 말로와 함께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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