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을 생각하며, 김훈의 <하얼빈>에 곱씹으며

2022. 12. 5. 17:21독서기록

728x170

 

영화 '영웅' 포스터

2022년은 안중근의 해인가. 문득, 12월 개봉 영화 목록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정성화와 김고은의 조합으로 안중근을 다룬 영웅을 발견한 것. 이 영화가 언제 나오나했는데, 12월이라니, 극장에 가야 할 일이 생긴 거 같다.

 

올해 가장 인상적인 소설 중 하나가 김훈의 <하얼빈>이다. 김훈은 <남한산성>, <칼의 노래> 등에서 보여줬든 역사물을 다룬 소설은 가히 대한민국 최고의 필력을 자랑한다. (현대물도 물론 잘 쓰지만.) <하얼빈>은 안중근을 다룬 소설인데 뭐랄까. 기존의 문법과 굉장히 다르다. 위인을 다루지만 영웅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한 젊은이의 모습이랄까.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갖고 거사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그래도 믿음 하나로 허허벌판에 뛰쳐나간 느낌이랄까.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김훈의 문장은 여전히 단단하고 간결하다. 그러면서도 묵직하다. 과연 김훈의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설 <하얼빈> 표지

 

<하얼빈>은 문장도 놀랍지만 그보다 눈부신 건 우덕순이라는 동료와 김아려라는 아내를 향한 작가의 시선이다. 우덕순이 누구인가. 안중근과 함께 이토를 죽이러 떠난 청년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에 있어 적지 않겠지만, 안중근만큼이나 중요했던 사람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토는 살았고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을지 모른다.

 

우덕순이 말했다.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
항구 앞 루스키섬의 등대 불빛이 어둠을 휘저었다. 불빛은 술집 안까지 들어왔다. 불빛이 스칠 때 우덕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에 대한 김훈의 시선은최고다. 어디에서나 포착하지 못했던 것을 작가가 해냈다.안중근은 밖에서 도모하는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김아려金亞麗는 시댁 사내들의 말을 귀동냥해서 남편의 일을 짐작했다. 김아려는 혼인한 지 십 년이 지났음에도 나그네 같은 남편을 어려워했다.”는 문장은 그녀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하얼빈으로 향했던 것을 누가 알까. 나는 <하얼빈>을 읽다가 비로소 알았고, 크게 놀랐고, 여러 번 감동했다.

 

<하얼빈>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안중근으로 향하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글이 길을 냈고 그리하여 우리는

 

저 세계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어떨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까.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하루를 마감한다.

 

 

영화 '영웅' 예고편 : https://youtu.be/K4KR4J-yBMw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