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 -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

2023. 8. 14. 00:38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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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남도의 작은 섬에 도착한다. 고등학생 이우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듯 입을 앙 다물고 있다. 도시에서 엄마와 사사건건 싸우고, 자신이 의지하던 친구를 눈앞에서 잃어버린 충격에 병원과 상담실을 다니던 터였다. 엄마는 그런 이우를 귀향 보내듯, 어렸을 때 살던 곳에 보내버렸다. 이우는 그렇게 이곳에 왔다.

옆에서 한 남자가 짐을 옮겨준다. 정모였다.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금 창고를 도서관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고 있다. 누군가의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책을 모으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의 시력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 그런 정모에게 친구 연수가 전화를 했다. 내 딸 좀 데리고 있어줘. 그래서 지금 소녀의 옆에서 짐을 옮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그렇게 시작한다. 작은 섬에 살고 있던, 어쩌다가 이곳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으로 오밀조밀하면서도 다채롭게 펼쳐진다. 멀어가는 눈으로 책을 모으는 정모, 서커스단에 있었다가 이곳에 온 판도, 판도를 키웠던 이삐 할미, 정모에게 소금창고를 내어준 태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우, 그리고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는 이우의 엄마 연수의 이야기는 그렇게 서로를 부르고 포옹하고 할퀴고 싸우면서 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왜 이리 애잔할까. 이야기 때문인가, 이 소설의 사연 때문인가.

소설가 정미경은 작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드문드문 읽고 있었다.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지라도 이 작가의 책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런 때에 마치 소설처럼 남편이 죽은 아내의 책상을 정리하다가 발표하지 않는 원고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이다. 이 원고를 발견했을 때 남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소설 속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보다 애잔한 것이 있을까.

소설은 그런 애잔함으로 가득하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굉장히 재밌다. 전작을 본 건 아니지만 이제껏 읽었던 정미경의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섬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금창고를 둘러싼 그 모습들은 환상적이면서도, 그곳에 머무는 이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꽤 매력적이기에 주말 동안 푹 빠져 읽었다. 적나라하기도 하다. 그들의 삶의 마디마디가 왜 이렇게 깊숙이 다가오는지.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다. 더불어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상처도 그러할 것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그 모습을, 저릿하게 봤다.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많아서 기뻤다. 애잔해서 좋았고 재밌어서 인상적이었다. 결말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작가가 바라던 생의 어떤 순간을 그 장면에 넣은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읽어서 다행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놓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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